"병사들이여, 짐은 그대들에게 만족하노라.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그대들은 짐이 기대했던 대담한 용맹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대들은 불멸의 영광으로 그대들의 독수리 훈장을 장식했다. 그대들은 오늘 단 하루에 러시아 제국 근위대의 군기를 포함한 40개의 깃발과 120문의 대포, 20명의 장군을 포함한 3만 명이 넘는 포로들이라는 영원히 빛날 전과를 올렸다.
"병사들이여, 짐의 민중들은 그대들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대들이 '나는 아우스터리츠의 전장에 있었다.'고 말하기만 하면 프랑스의 민중들은 '보라, 여기 진정한 용사가 있다.'라고 말하리라."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우스터리츠 전투 직후의 훈시.
아우스터리츠 전투(체코어: Bitva u Slavkova)는 삼제회전(三帝會戰; Battle of the Three Emperors)이라고도 하는데, 나폴레옹의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프랑스 제국에 대항하여 결성된 3차 동맹을 효과적으로 분쇄시켰다. 1805년 12월 2일(율리우스력으로는 11월 20일)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세(Napoleon I)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거의 9시간에 걸친 힘든 싸움 끝에 차르 알렉산드르 1세가 지휘하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퇴시켰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모라바의 브루노(브룬)에서 남동쪽 약 10 km(6마일) 떨어진 아우스터리츠(현재의 체코 슬라브코프우브르나)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는 흔히 전술상의 걸작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아우스터리츠에서 프랑스군의 승리는 3차 동맹을 종결시키는 결과를 야기했다. 1805년 12월 26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가 전쟁에서 발을 뺀다는 프레스부르크 조약(Treaty of Pressburg)에 서명하고, 이전에 맺어진 캄포포르미오 조약과 뤼네빌 조약을 강화하여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의 독일 연방에 영토를 양도하고, 전쟁배상금 명목으로 4,000만 프랑(francs)을 부과 받았다. 러시아군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가받았다. 아우스터리츠의 승리는 프랑스와 다른 유럽국가의 완충지대로서 작용하는 독일 국가의 연합체인 라인 동맹(Confederation of the Rhine)을 창설하게 하였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2세(Holy Roman Emperor Francis II)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1세(Francis I of Austria)만을 공식적인 직함으로 유지하게 되면서 멸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성취는 대륙에 지속적인 평화를 건설하지 못했다. 프로이센은 중부유럽에서 프랑스가 영향력을 키우는 것에 대해 우려하게 되고, 결국 1806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을 벌이게 된다.